양해영 사무총장 "야구가 왜 좋으냐건 그냥 웃지요"

[김재동의 만남] 프로야구와 함께 한 28년..그에겐 야구밖에 없었다 ②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6.02.07 08:00 / 조회 : 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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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MBC 청룡, 롯데 자이언츠, 삼성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 OB베어즈, 삼미 슈퍼스타즈 6팀으로 출범한 한국프로야구가 2016시즌으로 35주년을 맞았다. 원년 143만 8천여명의 관중은 10개 팀이 각축을 벌인 지난 시즌 역대 최다인 736만명을 기록했다. 35년간 간단없이 질적 양적 성장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KBO 양해영(55) 사무총장은 지난 1988년 KBO에 입사한 이후 그런 한국프로야구를 28년째 지켜온 인물이다.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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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양해영 사무총장.//사진= 박찬하 인턴기자


그는 야구를 좋아한다. 대책없이 좋아한다.

2006년 발병해 수술받은 직장암이 2008년 재발해 다시 수술받았을 때 그는 무려 7~8개월을 배변주머니를 찬 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이 무렵 베이징 하계올림픽에서 한국야구가 금메달을 따면서 야구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그는 배변주머니를 찬 채 동네 아이들을 모아 야구를 가르쳤다. 포털에서 양해영 총장의 프로필을 훑을때 눈길을 끄는 ‘관악리틀야구단 단장’ 직함이 그때부터 비롯됐다. 그는 아직도 욕심사납게(?) 그 직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야구가 왜 그렇게 좋아요?” 묻자 ‘허허’ 헛웃음을 앞세운다. “아니 뭐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우문에 현답으로 응수한다.

원래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시절엔 육상선수였고 수유중학교 2학년땐 새로 창단한 축구팀에 부모 몰래 가입해 3개월 공을 차기도 했었다고 회고한다. 축구를 중도포기한 이유는 축구를 하면서 성적을 유지하기에 벅찼고 45년간 교직에 계셨던 엄한 아버지에게 그 속사정을 들킬까 겁을 먹어서라고 고백한다.

야구명문 신일고로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야구에 빠지기 시작, 재수시절과 성균관대 독어독문과 시절을 거의 야구유니폼을 입고 보냈고 대학시절 결혼한 큰 형수가 그에게 건넨 예단조차 야구유니폼였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야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학과취업대표를 맡아 학교로 들어오는 추천서를 다른 학생들에게 분배해주고 남은 추천서 한 장이 KBO 추천서였다는 사실은 그와 야구사이의 어떤 필연성을 설명해주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라고 되물었듯 그는 삶을 당연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보인다. 그가 입사했을 당시 KBO의 근무여건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입사했으니 열심히 일하는게 당연했고 이미 적을 두고 있으니 다른 직장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야구를 끼고사는 일이니 오히려 행복할 뿐였다고도 덧붙인다.

그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 직장암 3기 통보를 받았을 때도 3기 생존확률이 60%정도임을 확인한 그는 ‘그럼 60%안에 들면 되겠네’란 결론을 내리고 열심히 운동하고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물론 재발 통보를 받았을 때 긍정의 힘을 소진하고 재수술을 포기하려했다고도 고백하지만 “살려줄만 하니까 하잔 거야”란 주치의 친구의 한마디에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살기위해 노력했다고 전한다. 그 생명의 은인인 수유중학교 동창 친구는 대장암 명의로 알려진 서울아산병원 유창식 교수다.

처음 직장암 수술을 받았을 때 그는 병가 30일만을 쉰 채 출근했다. 왜? 회사의 병가 내규가 그랬으니까란 답이 돌아온다. 하루에도 열두번은 화장실을 가야하는 고통. 출퇴근길이라도 막히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그래야했기 때문에 그랬노라는 그에게선 어떤 답답함마저 느껴진다.

그의 아내는 첫수술 하루전에서야 남편이 직장암 3기란 사실을 알았고 수술날 동행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손위 형님 한분만을 보호자 삼아 수술을 받았다. 당시 큰딸이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1학년였지만 자신은 생존확률 60%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발판정을 받고는 그도 막막했음을 털어놓는다. 털어놓는 그의 눈자위도 붉어지고 만다. 중1, 초등학교 3학년의 아이들과 아내. 그들을 두고 ‘내가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자각은 설명하기 힘든 회한을 불러왔을 테다. 완치판정받고도 3년이 흘렀지만 회고만으로도 당시의 목메임이 느껴진다.

“사모님께 잘해드려야겠네요?”

“아 저 잘하고 있어요”

“설거지 같은 것도 해주시나요?”

“아니 그건 안하죠”

“걸레질은 좀 해주세요?”

“예전에 몇 번 했던 기억은 있는데..”

“청소기는 좀 돌리시나요?”

“아 그건 한 달에 한 번 꼴로는 돌리죠”

“아, 돈을 많이 가져다 주시는군요?”

“집사람이 조그맣게 미술 학원해서 우리 그렇게 각자 살아요”

“대체 뭘 잘해주시는건가요?”

“같이 있는게 잘해주는 거죠. 뭐”

알고보니 그는 대단한 남자였다.

“2017년이면 임기가 끝나는데 은퇴후 계획은 차근차근 준비하시나요?”

“그게 문제죠. 먹구살만만하면 애들 야구하는데나 나가놀고 할텐데. 그러자면 돈을 벌어야겠고..”

“어떻게 버실려구요?”

“아니, 아니, 몰라요. 집하나 있는 것 뜯어먹고 살죠 뭐. 지금 그런 걱정 하고있을 틈이 없어요.”

아닌게 아니라 시계를 보는 품이 또다른 약속이 그를 채근하고 있는 모양새다. 바쁘기로는 대한민국 1%안에 들 것으로 보이는 양해영 사무총장. 그는 오늘도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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