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깊은 밤, 강우석 감독이 말한 '고산자'의 꿈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부산=전형화 기자 / 입력 : 2015.10.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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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사진=머니투데이 스타뉴스


많이 말랐다. 7㎏이 빠졌다고 했다. 머리는 하얗게 세고, 손가락마저 바짝 말라있었다. 강우석 감독은 '고산자'를 이제 3분의 1 정도 찍었을 뿐인데 몹시 지쳐보였다.

2일 늦은 저녁, 강우석 감독과 몇몇 기자들이 부산 해운대의 한 식당에서 조촐한 저녁자리를 가졌다. 지난 8월 '고산자' 촬영에 들어간 강우석 감독은 잠시 짬을 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한국영화 맏형답게 시간을 내 부산을 일부러 찾았다.


강우석 감독은 지난해 '두포졸'이 무산되자 머리를 식히려 캐나다로 훌쩍 떠났었다. 그 때도 부산영화제 기간에는 잠시 귀국해 영화계 후배들을 격려했었다. 재작년에는 부산영화제에서 선배 영화인인 이장호 감독의 '시선'을 보고 자신이 정식 개봉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겼었다.

강우석 감독에게 부산영화제는 선, 후배 감독과 영화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영화 승부사라는 별명답게 언제나 힘 있게 동료들을 격려했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힘을 얻는 듯 했다.

그렇지만 올해는 많이 지쳐보였다. 강우석 감독은 "'이끼' 때 돌아버리겠다고 했었는데 그 때보다 훨씬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만큼 '고산자'에 쏟는 공이 엄청 커보였다.


'고산자'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다. '고산자'는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지만 오히려 정확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던 고산자 김정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박범신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차승원과 유준상이 출연한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 속에 대동여지도에 담긴 이 나라를 일일이 찍어 넣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김정호처럼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렇게 공을 들여도 결국 두 시간 남짓한 시간 속에 스쳐가는 풍경일 수도 있는데, 강우석 감독은 김정호에 빙의라도 된 양 발품을 팔고 있다.

한국나이 56세. 강우석에게 '고산자'는 그 나이의 감독만이 담아낼 수 있는 꿈 같아보였다.

강우석 감독은 "김정호 선생이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역사 속에서 그냥 사라져버렸다"며 "나도 '고산자'를 만들고 난 뒤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한다"고 털어놨다. 그만큼 절실하고 절박해보였다.

무엇이 강우석 감독을 '고산자'란 꿈으로 이끌었을까. 강우석 감독은 "원작자인 박범신 작가가 김정호 선생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조선의 거인이라고 하더라"며 "한명은 왕이고, 한명은 장군이지만, 김정호는 양반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이 땅의 정확한 모습을 담으려 온 힘을 다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강우석 감독은 "논문들도 뒤져봤지만 워낙 사료가 없어서 김정호 선생에 대해 다양한 말들이 많다"며 "정확한 고증이 불가능해 내식대로 그의 노력을 그려내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5시간 걸려서 양양에 가서 2~3컷 찍고, 다시 4시간 걸려서 울산으로 가서 2~3컷 찍고, 다시 3시간 걸려서 남해로 가서 2~3컷 찍는 날들이 계속 되고 있다"며 "산 능성을 오를 때마다 이걸 어떻게 찍나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 김정호 선생은 어떻게 이 길을 걸었을까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강우석 감독은 "사람들이 내 영화엔 당연히 웃음과 눈물이 담겨 있을 것이란 선입견을 갖고 있다"며 "글쎄, 김정호 선생이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은 것처럼 나도 내 길을 걷고 있다. 정말 힘들지만 그래도 이 길을 끝까지 걸을 것"이라고 밝혔다.

비장한 각오만 이어지진 않았다. 바쁜 일정을 쪼개 강수연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잠시 들르자 함박웃음이 터졌다. "10분밖에 시간이 없지만 그래도 안 올수 없었다"는 강수연 위원장에 강우석 감독은 "위원장이 되더니 더 예뻐졌다"고 화답했다. 이에 강 위원장이 "원래 예뻤거든요"라고 하자 좌중에 웃음꽃이 피었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강우석 감독은 올 초 이용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사퇴 외압을 받자 부산에서 열린 영화제 총회까지 참석해 지지 의사를 밝혔었다. 당시 강수연도 자리를 함께 지켰었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은 부산영화제에 대한 동지의식도 갖고 있었다.

강수연 위원장이 떠나자 강우석 감독은 다른 장소에서 술을 기울이고 있는 스태프와 후배 영화인들을 찾아 일일이 술잔을 건네며 돌아다녔다. 하루 밖에 시간을 못낸다며 오늘 후배들을 두루 만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오해와 편견 속에서도,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러면서도 분명한 성과를 내는, 강우석 감독과 김정호 선생은 닮아보였다. 다른 게 있다면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사라진 김정호 선생과 달리 강우석 감독은 '고산자'를 내놓고도 또 다른 목표를 찾아 능선으로 올라갈 것 같다는 점이다.

부산의 밤은 그렇게 깊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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