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장수'로 써내려간 배우 김인권의 자서전(인터뷰)

영화 '약장수'의 김인권 인터뷰

김현록 기자 / 입력 : 2015.04.23 07:04 / 조회 : 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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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권 / 사진=김창현 기자


하나로도 영화 하나를 감당하기 족할 슈퍼히어로들이 떼로 나오는 블록버스터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개봉하는 23일, 혈혈단신 개봉하는 영화가 있다. 단 4억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약장수'(감독 조치언)다. 우주인과 초능력자와 로봇이 뒤엉켜 돌아가는 '어벤져스2'의 화려한 판타지가 입을 떡 벌리게 한다면, '약장수'는 그만 입을 다물게 하는 영화다. 어렴풋이 짐작만 했을 뿐 그다지 뒤척여보고 싶지 않던 현실의 이면을 펼쳐 눈앞에 들이민다. 검증 안 된 건강용품 따위를 노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아 가끔 뉴스에 나는 홍보관, 일명 '떴다방'이 그 무대다.


주인공 일범은 구직난 속에 아픈 딸을 두고 볼 수 없어 홍보관에 취직한 가장이다. 억지 재롱이라도 부리며 간 쓸개를 다 빼주는 광대가 되었다가, 수금을 위해선 할머니 손의 반지라도 뽑아 챙겨야 하는 악한이 되어야 한다.

배우 김인권(37)이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닌 이 처연한 남자가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넉살 좋은 코믹 캐릭터로 먼저 인기를 얻은 천생 배우지만, 기실 그는 사실 낯가림이 심하고 숫기도 없어 판을 깔아줘야 작심하고 웃길 수 있는 사람이다. 어린 나이 결혼해 세 딸을 키우는 가장이자 스스로 인정하는 생계형 배우이기도 하다.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10대 시절, 없는 살림에 수십만 원짜리 옥장판을 홍보관에 가서 사오던 외할머니며 고모를 보며 혀를 찼던 경험도 있다.

우두커니 홍보관 한 쪽에서 굳은 표정으로 박수나 치던 일범이 성화에 못 이겨 떨리는 목소리로 "저 푸른 초원 위에"를 불렀다가, 신명나는 할머니들 추임새에 그만 피식 웃고 마는 영화 속 장면. 나는 일범이 아닌 김인권을 본 것만 같았다.

"잘 됐으면 좋겠죠. 흥행 결과를 떠나서 제 인생에 좋은 작품이에요. 이 시기에 딸 키우는 아빠로서, 밖에 나가 분 바르는 사람으로서 제 모습이 잘 담겼어요. 제가 보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제 인생을 자서전처럼 쓰고 간 느낌이 있어서 참 좋더라고요. 다만 관객과 공감하느냐가 문제인데 꾸준히 하다보면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해요. 저는 무비스타가 아니에요. 관객이 보고 싶은 사람이 무비스타라면, 저는 뭔가를 보여드리고만 싶은 사람이죠. 그래서 잘 안되더라도 페이소스가 생기지 않을까요. 아유, 벌써 눈물이 나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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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권 / 사진=김창현 기자


홍보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간이라도 빼 줄 듯 할머니들의 비위를 맞추는 홍보관 사람들,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사느라 비싼 돈을 써 가면서도 즐거워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사기행각' 운운하는 뉴스로만 접하던 '떴다방'의 다른 면을 실감케 한다. 일범 역시 홍보관에 다니는 할머니 옥님(이주실 분)을 아무렇지 않게 '엄마 엄마' 부르며 말 못할 교감을 느낀다. "어떤 자식이 한 시간 씩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재롱 떨어줘"라는 떴다방 점장 철중(박철민 분)의 대사를 반박할 이 누군가. 기자들로 가득한 언론시사회에선 그에 이어진 "무식한 기자 놈들이 뭘 모른다"는 대사에 그만 폭소가 터졌다.

"이 영화가 어떻게 보면 남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인데, 저 개인의 삶도 모성애와는 거리가 있었어요. 어머니가 워킹맘이셨는데, 일찍 돌아가셨어요. 외할머니랑 살다가, 고모랑 살다가 하다보니 엄마와 자식에 대한 끈끈함이 제가 좀 떨어진다 할까요. 이주실 선생님한테 '엄마' 소릴 하면서 자기 엄마가 떠올랐다면 다른 양상이 됐을 텐데, 저는 마치 엄마를 처음 만나는 느낌이었거든요.

저희 외할머니랑 고모가 다 '떴다방'에 다니고 했어요. 반지하 방 한 달 월세가 50만원 할 때인데, 어느 날은 27만 원을 주고 옥장판을 사 오신 거예요. 자는데 벼룩이 있는지 너무 가렵다고 했더니, 문의를 하고 온 고모가 '그래야 낫는 거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약장수' 시나리오를 보면서 '아 여기가 거기구나' 했죠. 외할머니도 고모도 너무 즐겁게 홍보관을 다니셨어요. 그 기간 동안은 예뻐지셨을 만큼. 이런 말도 안 되는 순기능이 있었다는 걸 시나리오를 보면서야 안 거죠."

김인권은 분투하는 일범에게서 어려운 무명 시절 자신을 보기도 했다.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좋은지 슬픈지 모를 표정으로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그대로 '약장수'의 포스터가 됐다. 당시를 떠올리며 김인권은 "딸을 살리겠다며 영혼이 팔린 사람의 슬픔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려 20번 넘게 테이크를 간 장면인데, 결국엔 첫 컷이 OK컷이 됐다. 그는 피식 웃으며 "먹고살려고 그러는 일범도, 그리 분장하고 배우를 하는 나 자신도 처량하고 처절했다"고 털어놨다.

"제가 살아온 게 힘들지 않았다면 눈물겨운 생존기를 그리는 게 힘들었겠죠. 저는 아직 취미가 없어요. 그럴 여유도 별로 없고, 재밌지도 않고요. 제가 배우라고 밖에서는 막 그러지만 집에 가면 똑같은 아빠예요. 가족들 잘 섬기고 고생 안 시키고 싶어하는 건 똑같죠. 그런데 애들이 제가 소시민으로 나오는 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아빠가 멋있었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서 그런가봐요. 애들이 '어벤져스2' 보러간다 할까봐 걱정이 되긴 하네요.(웃음)"

조심조심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털어놓는 김인권의 이야기와 함께 '약장수' 속 김인권의 모습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남들은 다 피해갔다는 '어벤져스2'와의 결전을 앞두고 김인권은 빙긋 웃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다"면서. 그건 자신과 닮아있는 이 처연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만큼 만족스럽게 그려졌다는 김인권 식 표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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