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독과점과 파라마운트 판결이라는 유령①

[스타뉴스 10주년 기획]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4.09.2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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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파라마운트 판례라는 유령이다. 스크린독과점 해결을 위한 논의에서 불거진 이 유령은 극장을 갖고 있는 대기업투자배급사에는 경악을, 영화제작사들에겐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양쪽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스타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영화계 최대현안 중 하나인 스크린독과점 문제를 집중 조명한다.

지난 16일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국회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 설훈, 국회의원 도종환 의원실이 공동주최한 한국영화시장 독과점 현황과 개선을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은 회장은 "자국영화 시장점유율이 50%가 넘는 호황을 이루고 있지만 시장의 95%는 4대 메이저 회사가 점유하고 있다"며 "독점시장을 깨고 배급, 상영이 분리되는 날까지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은 회장이 한 이 말은 현재 상당수 영화제작가 및 교수, 평단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대변한다. 스크린독과점 등 한국영화의 구조적인 문제는 대기업 수직계열화 때문이며, 따라서 투자배급사가 극장을 갖고 있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CJ E&M에선 CGV가,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선 롯데시네마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주장의 중심엔 파라마운트 판례가 놓여있다. 1948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대한 반독점 소송에서 메이저 스튜디오들에게 극장 매각을 명했다. 파라마운트 판결이라고 불리는 이 판결은 195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를 촉발시킨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많은 한국영화인들은 대기업의 극장과 배급 겸업을 금지한 파라마운트 판결이야말로 현재 스크린독과점을 비롯한 한국영화계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날 세미나에서도 박경신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이 파라마운트 판결이 여전히 유효하다며 발제자로 나섰다.


파라마운트 판결을 한국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이뤄졌다. 지난해 4월 당시 민주통합당 최민희 의원은 △영화상업업과 배급업 겸업 금지 △대기업의 영화제작업 참여 금지 △멀티플렉스 극장의 특정 영화 스크린 점유 제한 등을 담은 영화및비디오물의진흥에관한법률(영비법)을 발의하려 했었다. 파라마운트 판결을 모태로 한국영화산업에 대기업 수직계열화를 막는 가장 강력한 규제를 마련하려 한 것. 발의가 미뤄지긴 했지만 국회를 통한 이런 규제안을 마련하려는 영화계 움직임은 물밑에서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이날 세미나를 국회위원회관에서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국회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 설훈, 국회의원 도종환 의원실이 공동주최한 것도 그런 움직임의 일환이다.

영화계 한편의 이런 움직임에 CJ E&M과 롯데 등 대기업도 조용하지만 물 밑에서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기업들은 투자배급과 극장을 분리하라는 것 자체가 영화산업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기업들은 한국영화 시장이 2억 관객을 맞기까지 대기업이 산업의 근간 역할을 하며 많은 노력을 했는데 파라마운트 판결을 도입하면 산업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파라마운트 판결 직후 미국영화 시장은 제작편수 감소와 티켓 가격 상승 등으로 침체기를 맞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안정적인 상영망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르 영화에만 집중하면서 제작편수가 줄고 장르 편중이 심해지면서 영화산업이 뿌리부터 흔들렸다는 것. 또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영화사 극장 소유가 다시 증가하고, 1996년 텔레커뮤니케이션 법 제정 이후 방송 등 콘텐츠산업의 수직계열화가 허용돼 사실상 파라마운트 판결은 사문화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한국영화산업에 파라마운트 판결을 도입하면 미국처럼 영화산업이 침체기를 맞고, 장르 편중이 심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한국영화 시장이 대리운전시장(약 3조원)보다 작은 2조원 규모밖에 안되기 때문에 미국처럼 파라마운트 판결을 도입하면 시장 자체가 위축돼 모처럼 맞은 성장기회를 잃을 우려가 있다고 보고 있다.

대기업들의 이 같은 반발에 파라마운트 판결을 도입하려는 측은 다시 반박한다. 파라마운트 판결로 미국영화시장이 침체기를 맞았다기보단 TV시장이 본격화되고, 2차 대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가 새로운 문화소비층으로 떠올랐으며,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는 도시화가 이뤄져 극장소비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또 미국 영화산업은 파라마운트 판결 이후 위기를 겪었지만 그 결과 1960년대 아메리칸 뉴시네마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해외시장 개척, 부가판권 시장 활성화 등 다양한 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양측의 주장은 물밑에서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지만 아직 공론화되지는 않고 있다. 대기업들은 배급업과 상영업을 분리한다는 논의 자체가 공론화되는 걸 꺼리고 있으며, 파라마운트 판결 도입을 원하는 쪽은 대기업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한 탓이다.

양측은 건널 수 없는 강 저편에서 서로를 향해 활을 쏘아대고 있다. 스크린독과점 등 여러 현안을 하나하나 협의를 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마련되지 않기에 양쪽의 주장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특정영화에 스크린 쏠림현상은 극장 성수기마다 매번 되풀이되지만 구체적인 해결책 마련은 요원한 상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중재해야 할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개전휴업 상태다. 영진위는 2011년 각 영화산업 주체들과 함께 한국영화 동반성장협의회를 발족하고, 2013년 한국영화 동반성장 이행협약 부속 합의를 마련했었다. 이 합의에는 스크린 독과점 해결을 위한 부속 방안과 스태프 4대 보험 의무가입 등 그동안 영화계 현안으로 꼽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합의 방안들 실현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동반성장 이행협약을 이끌어야 할 영진위가 위원장조차 제대로 뽑고 있지 못한 상황인 탓이다. 김의석 영진위원장 임기가 지난 3월 만료돼 3차에 걸쳐 공모가 진행됐는데도 6개월이 넘도록 아직까지 새로운 위원장을 임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지라 동반성장 논의를 이끌 동력이 없다.

정부는 나몰라라하고, 대기업과 제작자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해 논의조차 지지부진하다. 스크린독과점 문제가 매번 되풀이되면서도 해결방안이 제자리걸음인 이유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한쪽에선 가장 커다란 규제방안인 파라마운트 판결을 전면에 내세우고, 다른 쪽에선 더욱 강한 반발이 나오고 있다.

논의의 필요성은 각자 인식을 하고 있다.

파라마운트 소송을 다룬 '할리우드 독점전쟁'의 저자인 장서희 변호사는 "파라마운트 판결을 이미 사문화된 판결로만 치부하거나, 그렇다고 극장 분리안에만 천착할 필요는 없다"며 "한국 영화계 독과점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선 구조적 규제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보다 총체적인 관점에서 가장 효율적인 해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은 제작가협회장은 "당장 논의가 결론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부터 논의를 시작하면서 올바른 시장 상황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오희성 롯데엔터테인먼트 영업기획팀장은 "서로 파트너로 신뢰를 쌓아가며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씩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밝혔다.

작은 것부터 한걸음씩,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더 늦으면 진짜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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