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언덕', 익숙함과 신선함의 공존

안이슬 기자 / 입력 : 2014.09.02 03:00 / 조회 :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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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하는 것, 홍상수 감독의 전매특허다. 영화 '자유의 언덕'은 북촌이라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익숙한 공간에 찾아온 이방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문소리, 김의성, 윤여정, 정은채와 북촌, 그리고 이방인 카세 료를 버무린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 감독이 보여주던 익숙함과 신선함이 묘하게 공존한다.


몸이 아파 지리산으로 요양을 갔던 권(서영화 분)은 서울에 돌아와 한 뭉치의 편지를 건네받는다. 2년 전 자신에게 청혼을 했던 일본남자 모리(카세 료)에게서 온 편지들이다. 날짜도 없는 편지들을 가지고 그는 동네의 카페로 향한다. 카페 이름은 지유가오카 핫초메(자유의 언덕 8번가). 한 장 한 장, 찬찬히 뒤섞인 편지를 읽어가며 권은 한국에서 보낸 모리의 일상을 곱씹는다.

모리는 수많은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받는다. 일본인이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비즈니스냐, 관광이냐"고 묻고,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모리는 관광이라고 하긴 좀 애매하다는 듯 말을 더듬는다. 서울에 온 것은 권을 찾으려는 목적이지만 한국에서 보내는 그의 며칠은 예상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물론 비즈니스도, 관광도 아닌 오묘한 일상이다.

그의 손에는 항상 손에 '시간'이라는 제목을 책을 들고 북촌 이곳저곳을 활보한다. 책의 내용에 대한 물음에 모리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정확히 나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유의 언덕'도 그렇다. 계단에서 흩어져 순서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편지처럼 영화 속 시간의 순서는 마구 뒤섞여 있다. 어느 순간에는 카페 주인과 진탕 와인을 마시고 있고, 한참 뒤의 장면에서는 그 여인과 첫 만남이 그려진다. 저 여자는 왜 화를 내고 있을까, 이 두 남자는 왜 이렇게 가까워 졌을까. 한 가지 궁금증이 해결되면 또 다른 물음표가 자연히 따라붙는 구성은 커다란 사건 없이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끌고 가는 홍상수 표 일상을 조금 더 흥미롭게 들여다보도록 한다.

여기저기서 툭툭 인물들이 튀어나오는 '자유의 언덕'의 구성은 모리가 묵는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과도 닮았다. 어딘가에 잔뜩 골이 나 떽떽 소리를 지르던 여자(정은채 분)는 어느 날 나타난 아버지와 함께 홀연히 사라지고, 함께 취할 때 까지 술을 마시던 외국 남자는 그저 하룻밤의 말동무로 잊혀 진다. 이방인인 모리의 곁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각각의 사연들은 흔적만 엿보인 채 공중으로 사라진다.


사랑하고, 동시에 존경하는 여인을 만나러 왔다는 모리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영선(문소리 분)과 하룻밤을 보낸다. 지고지순한 로맨스의 주인공인 줄 알았던 모리도 결국 어쩔 수 없는 남자다. 침대에서 사랑한다 말하고 방에 돌아오며 머리를 쥐어뜯는 모리의 모습은 술김에, 어쩌다가, 순간 혹해서 사랑을 나누던 홍상수의 남자들과 궤를 같이 한다. 심각하게 그의 도덕성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우유부단하고 애매모호한 모습에 한번 픽 웃으면 그만이다.

문소리, 윤여정, 김의성, 정은채, 서영화, 기주봉 등 홍 감독과 전작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은 '자유의 언덕'에서도 적재적소에 녹아들었다. 익숙하지만 반가운 얼굴이다. 홍상수 감독의 세계에 뚝 떨어진 이방인 카세 료는 친화적인 듯 하지만 은근히 예민한 구석이 있는 모리에 제 옷인 양 스몄다. 9월 4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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