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 더 재미있다! '명량' 사용설명서③

[★리포트]

안이슬 기자 / 입력 : 2014.07.22 10:40
  • 글자크기조절
image
사진=영화 '명량' 스틸


성웅 이순신 장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대표적 승전인 명량대첩 8시간의 기록을 스크린으로 옮긴 '명량'은 전투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리더십과 고뇌를 담았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과 전술에 대해 한 번 쯤은 들어봤겠지만, 모든 용어와 인물들의 이름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을 것. 거북선 외에 이순신 장군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없는 관객들을 위한 '명량' 사용설명서를 준비했다.


명량대첩

정유재란 시기인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무찌른 전투. 실제로는 12척의 배에 차후 합류한 한척까지 총 13척의 배가 참전했지만 영화에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 내용을 토대로 12척의 판옥선만 담겼다. 당시 왜 수군은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가 지휘했으며, 31척의 배가 격퇴된 후 후퇴했다.

일자진


명량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진법. 12척의 배를 일자로 배치해 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 울돌목의 길목을 막았다.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적을 둘러싸는 진형인 학익진도 일자진을 취하다가 적이 가까이 다가오면 중앙의 부대가 후퇴하며 포위하는 형태를 띤다. 참고로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을 이용해 승리를 거둔 해전은 한산도 대첩이다.

백병전과 충파

적선의 배 위에 병사들이 직접 올라타 무기로 맞서는 근거리 전투 형태를 백병전이라고 한다. 충파는 배와 배를 직접 부딪쳐 상대의 배를 침몰시키는 전술이다. 실제로 명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은 조류에 묶여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던 왜 수군에 충파와 포격을 반복해 많은 배를 격침시켰다.

이순신의 파직

영화 '명량'의 도입부에는 이순신이 누명으로 파직 되었고, 이후 조선수군통제사로 다시 임용되는 과정이 간결하게 설명된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첫 임명 되었고,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 등 몇몇 해전을 통해 왜 수군을 공격하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모함과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조정의 출정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한양으로 압송돼 모진 고문을 받고 파면됐다. 이순신에 이어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 수군에 대패하자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거북선과 판옥선

이순신 장군하면 누구나 거북선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명량대첩에서는 거북선이 출전하지 않았다. 명량대첩의 주력선은 판옥선으로, 조선 수군의 대형 전투선이다. 거북선은 상판이 철갑으로 되어있는데다 창검과 송곳이 솟아있어 적이 오르지 못하게 했고, 사방에는 화포를 설치했다. 거북선이 첫 출전한 전투는 1592년 벌어진 사천 해전이다. 물론 '명량'에서 거북선의 모습을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순신의 큰 아들 이회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곁을 지키는 남자가 있다. 바로 그의 큰 아들이자 조선의 무신이었던 이회(권율 분)다. 이회는 실제로 임진왜란 발발 후 이순신 장군을 따라 한산도 대첩, 명량대첩 등 전쟁에 함께했다. 이순신 장군은 은 첫째 아들 이회를 비롯해 아들 이예와 이면 등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며, 이회는 첨정을, 이예는 정랑을 지냈다. 셋째 아들 이면은 1592년(임진년)에 피난 중 왜군과 싸우다가 사망했다.

구루지마 미치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여했던 왜의 장수다. 임진왜란에서는 육군으로, 정유재란에서는 수군으로 참전해 명량해전에서 전사했다. 형 구루지마 미치유키는 임진왜란 초기 당포해전에서 전사해 두 형제 모두 조선 수군에 목숨을 잃었다. 영화 '명량'에서는 류승룡이 구루지마 역을 맡았다.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