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바람이 분다' 논란에 답하다(인터뷰)②

[★리포트]

도쿄(일본)=김현록 기자 / 입력 : 2013.08.30 09:19 / 조회 : 2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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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가 드디어 다음달 5일 개봉한다. '벼랑위의 포뇨' 이후 5년만에 돌아온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은 이미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바람이 분다'는 일본에서 6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600만 관객을 넘긴 히트작이자 화제작이 됐고, 제 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되는 저력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다른 의미로 화제작이 됐다. '가미가제 폭격기'로 알려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주력기, 제로센을 만든 호리코시 지로를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경화로 한일관계까지 경색된 요즘, 한국 관객에겐 더욱 불편한 인물이다. 그러던 중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 인식을 강한 어조로 비판해 화제가 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또한 높아졌다.

어린이를 위한 아름다운 판타지를 그려 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바람이 분다'를 통해 처음으로 현실의 이야기, 어른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브리 특유의 서정적 2D 화면에는 전쟁을 일으켜 파멸해가는 나라 덕에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비행기를 만들 수 있었던 호리코시 지로의 아이러니가 담겼다. 또한 지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일본 문학가 호리 타츠오의 소설 속 아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가 비극의 시대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전쟁에 대한 직접적 묘사가 최소화된 가운데 히노마루(일장기)를 단 모든 비행기가 추락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최근 도쿄에 위치한 개인 아틀리에에서 스타뉴스와 만나 '바람이 분다'와 그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말했다. 미처 묻지 못한 질문에도 서면으로 긴 답을 보내왔다. 한국의 관객들이 편견 없이 작품을 보길 바라는 거장의 진심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실존인물과 시대적 배경이 등장하는 작품을 내놨다. 늘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다가 이런 변화를 시도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상업주의와 타협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데 동요치 않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현재 세계가 격변기에 접어들면서 시대의 톱니바퀴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 지독히도 많은 질문을 받고 있다. 아이들을 잠깐 기다리게 하고, 한 소년으로 돌아가 어려웠던 시대를 살아본 것이 이번 '바람이 분다'다.

-왜 하필 논란의 위험이 있는 제로센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를 주인공으로 삼았나.

▶그의 젊은 날 사진 한 장이 심금을 울렸다. 부끄럽다. 논란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릴 만한 인물이라고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무기를 사용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자'는 데 대한 의문은 저와 스태프에게도 있었다. 정의는 보장되지 않고, 시대의 왜곡 속에서 꿈이 변형되고, 고뇌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살아야만 하는… 그런 건 사실 현대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 운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의식은 안했겠지만 그가 만든 비행기가 태평양 전쟁에 쓰였다. 내가 열심히 살아왔다고 해서 무조건 면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저는 '이웃집 토토로'를 어린이들이 밖에서 뛰어 놀길 바라는 바람으로 만들었지만 결국엔 아이들이 집안에서 TV를 보게 됐다. 간단치가 않다. 열심히 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지 않나.

◆논란 감수하고 주인공 선택..미화하지 않았다..

-전쟁무기를 만든 인물을 미화했다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나.

▶미화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많이 있겠지만 제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라는 제목은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는 폴 발레리의 시에서 따 왔다. 어떤 의미를 담았나.

▶세계이며, 생명이며, 시대다. 바람은 산뜻한 바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의 거센 바람, 방사선을 포함한 독이 든 바람도 불어댄다. 동시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은 생명이 빛나는 증거이기도 하다. '세계는 있다. 세계는 살아있다. 나도 너도 살아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영화에는 감독의 역사인식과 그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있다면.

▶현대, 이 순간 저는 지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저희 부부는 검소하게 살려고 마음먹고 있지만, 모든 돈을 의미있는 곳에 기부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시대를 사는 것은 그 시대·사회의 왜곡과 함께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 왜곡을 자기 자신의 왜곡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좋다. 영화가 너무 길어서 끝낼 수 없는 게 아닌가라는 불안과 싸운 지난 2년이었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시대에 휩쓸릴 뿐

-주인공이 자꾸 '일본은 가난하다'고 반복해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도경제 성장의 결과 숫자상으로 현재 '일본은 풍족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저 역시 '일본은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게임·영화에 빠진 아이들, 과도한 소비나 경쟁, 이웃에 대한 무관심…. 물질과 마음이 균형이 잡힌 사회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문화예술계 인사의 정치적 의견 표명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목소리를 내야 할 부분에서 소리를 내지 않으면 시대에 휩쓸려 버린 것일 뿐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라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원로 만화가는 한국에도 여럿 있지만 원로 애니메이터는 전무하다. 무엇이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나.

▶애니메이터가 되고 나서 세계의 비밀을 조금 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움직임이란, 빛이란, 감정이란, 육체란, 시간이란…. 무척 매력있는 틈새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더더욱 민감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한국 관객들이 어떻게 영화를 봐줬으면 하는지.

▶반일감정은 반한감정도 발생시킨다. 저는 동아시아가 평화롭기를 마음 속 깊이 바란다. 영화를 보고 보지 않고는 개인의 자유다. 어떻게 볼 지도 개인의 자유다. 다만 저는 고뇌하면서 성실하게 이 영화를 제작했다. 이 점만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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