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미야자키하야오의 뻔뻔하고 슬픈꿈①

[★리포트]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3.08.3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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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스틸/사진제공=대원미디어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늘에 꿈을 갖고 있다. 아버지가 비행기회사의 공장장이었던 탓인지, 그는 하늘에 대한 동경을 그동안 작품 곳곳에 녹여왔다.

쌍엽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녔던 '붉은 돼지'는 말할 것도 없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마녀 우편배달부 키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많은 작품들 속에서 활공하는 장면들은 백미로 꼽혔다.


'바람이 분다'는 하늘에 꿈을 갖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던진 돌직구다. '바람이 분다'는 가미가제 폭격기로 알려진 전투기 제로센을 설계한 실존인물 호리코시 지로의 이야기다. 호리코시 지로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품을 만들며 급성장한 당시 미츠시비내연기(현 미츠비시중공)에서 항공 설계주임을 맡아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가볍고 빠른 전투기 제로센을 개발했다.

하늘에 꿈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이야기를 커브도, 슬라이더도 아니라, 직구로 관객에게 뿌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첫 장면부터 '바람이 분다'는 이런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집에서 비행기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오르던 소년 호리코시 지로는 그만 하늘 가득 떨어지는 폭탄을 맞아 비행기가 산산조각 나서 떨어지면서 잠에서 깬다. 꿈이다.

하늘에 꿈을 품고 있지만 전쟁에 산산조각 나버린 꿈. 바람이 분다. 그래도 살아야하고 꿈은 품어야 한다는 이야기.

소년 호리코시 지로는 비행기 설계를 공부한다. 밥 먹을 때 고등어 가시를 봐도 비행기 날개를 떠올린다. 꿈을 꿔도 이탈리아의 비행기 제작자 카프로니 백작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그에게 비행기 설계는 산다는 의미와 같다.

애써 만든 비행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실의에 찬 호리코시 지로는 한적한 산의 호텔로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호리코시는 어릴 적 인연이 있는 나호코를 만난다. 사랑에 빠지지만 나호코는 결핵을 앓고 있다.

결혼을 결심하고 산에서 내려온 호리코시는 일본 해군의 발주로 제로센을 만든다. 결핵으로 요양원에 있던 나호코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호리코시와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그를 찾는다. 호리코시는 병든 아내를 곁에 두고 제로센을 완성시킨다.

'바람이 분다'는 과거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유럽이나 환상을 바탕으로 꿈과 희망을 그렸던 그는 '바람이 분다'로 일본이 쌓아온 것들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일본이 꿈이 없어 가난하다고 말한다.

비행기 설계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지만 과거 어느 작품보다 하늘에서 활공하는 전투장면이 없다. 비행기끼리 쏘아 죽이는 장면을 철저히 배제했다. 하늘로 올라간 비행기들, 특히 일장기를 단 비행기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추락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선택이다.

대신 미야자키 하야오는 천재적인 비행기 설계자부터 일본 군국주의의 부역자까지, 일본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호리코시 지로를 그저 열심히 꿈을 쫓는 사람으로 그리는 데 주력했다. 뻔뻔할 수 있지만 뻔뻔한 사람이 꿈을 이룬다.

지로와 나호코의 사랑도 지로의 뻔뻔함을 드러낸다. 순수한 사랑? 지로가 산에서 만난 독일인 카스트로프가 말했듯 그곳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마의 산'은 죽음에 대한 동경이 삶에 대한 호감으로 바뀌는 걸 그린 소설이다.

지로는 나호코를 만나 사랑과 함께 다시 비행기에 대한 꿈을 불태우는 힘을 얻는다. 그의 사랑도 뻔뻔하다. 결핵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담배를 필 것을 허락하자 곧장 담배를 품어대며 비행기 설계를 이어간다. "남자에겐 일이 더 중요한 법"이란 세상이었다.

호리코시 지로의 이 사랑 이야기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일본 소설가 호리 타츠오의 소설에서 따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사랑 이야기도 결국 꿈을 쫓는 사람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가져왔을 뿐이다.

지로가 만든 제로센은 한대도 돌아오지 않았다. 일장기를 휘날리던 비행기들은 잔해가 됐다. 그의 꿈은 실패한 것일까? 애초 그는 꿈을 꾸어선 안됐던 것일까? 그의 꿈이 많은 사랑을 죽게 했으니 그의 꿈은 죄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붉은 돼지'에서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되는 게 나아"라고 했다. 그랬던 그는 '바람이 분다'에선 바람이 불어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꿈을 쫓아야 한다고 말한다. 꿈이란 뻔뻔해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 관객에겐 제로센 설계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바람이 분다'에서 묘사된 관동대지진 당시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인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 장면은 물론 '바람이 분다'엔 없다. 태평양 전쟁, 중국 전쟁도 없다. 그저 일본은 망한다는 걸 알면서도 비행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그려진다.

관동대지진 땐 사실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 군부에 눈엣 가시였던 일본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도 소동을 틈타 죽임을 당했다. 미친바람이 불었던 시대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일본만화의 신 데츠카 오사무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담아 그린 '종이요새'란 단편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 막바지, 고등학생이던 데츠카 오사무도 군수공장에 동원된다. 그는 그곳에서도 몰래 만화를 그리다 비애국자라며 두들겨 맞는다. 데츠카는 미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불타 죽는 것을 보고 "사람이 죽은 것인지, 인형인지"라며 절규한다. 그는 패전이 선언되자 "이제 만화를 마음껏 그릴 수 있다"며 만세를 외친다. 데츠카 오사무는 그의 작품 속에서 늘 전쟁에 대해 반대를 그려왔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데츠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았다. 데뷔작 '미래소년 코난'부터 군국주의를 경계하고 그런 미친 세상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바람이 분다'는 거장이 "비행기는 아름다워도 저주 받은 꿈"이라며 고뇌와 성찰 끝에 내놓은 답이다.

일본에서 800만 가까운 관객이 이 이야기에 동참한 건 3.11 대지진 이후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마음에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관객에게 '바람이 분다'가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뻔뻔한 꿈에 동참한다면 흠뻑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바람이 분다'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늘 함께 일해 온 음악감독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이번에도 아름답다. 그리고 슬프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레이아웃을 보여주는 지브리의 전통은 이번에도 아름답다. 그리고 슬프다. 아라이 유미가 부른 엔딩곡 '비행기 구름'은 아름답다. 그리고 슬프다.

9월5일 개봉. 전체관람가. 지금은 미친바람이 불지 않는 시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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