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 故길은정 그리고 영화는 영화다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2.01.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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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7일이었다. 고 길은정은 전 남편 편승엽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이날 징역 7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철규 판사는 "편승엽과 그 가족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나 합의의 노력이 없는 등 반성의 여지가 없어 이같이 판결했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이 판사는 판결문을 낭독한 뒤 길은정에게 "여담이지만 꼭 내 생각만이 아니라 남의 피해도 돌아보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이 판사는 길은정의 건강상태를 고려해 법정구속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길은정은 판사의 선고 낭독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피고인석에 있는 나무를 두 손으로 잡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러다 "판사가 선고하기 전에 전화를 해서 합의를 종용했었다"며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결국 길은정은 지인들과 법원경위에 업히다시피 끌려 나갔다.

7년이 넘게 지난 일이 떠오른 건 요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부러진 화살' 때문이다.


지난 18일 개봉한 '부러진 화살'은 24일 23만 4688명을 동원,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누적 90만 6895명이다. 손익분기점 50만명을 이미 훌쩍 뛰어넘었다. '부러진 화살'은 개봉 첫날 245개 스크린에서 상영됐다가 24일에는 456개 스크린으로 확대됐다. 그만큼 관객이 많이 찾고 있단 뜻이다.

'부러진 화살'의 이 같은 기세는 뜻밖이다. 60대 감독이 연출했으며, 5억원이 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가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러진 화살'은 '남부군' '하얀전쟁'의 정지영 감독이 1998년 '까' 이후 13년만에 내놓은 작품. 대학교수가 항소심 부장판사를 찾아가 석궁으로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실형 4년을 선고받은 이른 바 '석궁사건'을 소재로 했다.

석궁테러 사건은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55)가 교수지위 확인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하자, 2007년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박홍우 부장판사(현 의정부지법원장)를 집 앞에서 석궁으로 쏜 혐의(살인미수)로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김 전 교수는 대법원서 징역 4년이 확정돼 복역한 뒤 지난해 1월 출소했다.

영화는 김 교수가 주장했던 것처럼 부러진 화살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과 다른 화살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점, 박 부장판사의 와이셔츠에 혈흔이 없었던 점 등을 들며 증거 조작 논란을 제기하고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사법부에 분노하고 있다.

당시 석궁사건 피해자였던 박홍우 부장판사(현 의정부지법원장)가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BBK 주가조작 관련 의혹을 제기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정봉주 전 의원의 2심 재판을 맡았던 것이 알려지며 '나꼼수' 팬들 사이에서 성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법원이 지난 11일 전국 법원에서 언론홍보를 담당하는 공보판사들에게 해당 소송에서 피고인의 주장과 법원 판결을 정리한 대응 매뉴얼을 발송했지만 분노는 일방적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시사평론가 진중권이 영화가 사실을 호도한다고 지적하면서 논란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의견과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만큼 분노는 당연하다는 의견으로 나눠 사이버 공간이 들끓고 있다.

영화는 실화를 다루더라도 감독의 주관이 담겨있는 창작물일 뿐, 진실은 아니다. 사실을 촘촘히 배치하더라도 감독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된다. 극적인 장치를 위해 더러는 허구도 가미된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퍼펙트 게임'은 1987년 5월16일 무승부로 끝난 고 최동원 선수와 선동렬 선수의 명승부를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에선 1-2로 뒤지던 해태가 9회 초 가상 인물인 박만수(마동석 분)의 솔로 홈런으로 동점을 만든다. 실제는 대타로 나온 김일환 선수가 2루타로 동점을 만들었다.

사실에 근접한 다큐멘터리도 감독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지는데 상업영화는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부러진 화살'에선 변호사가 최후진술에서 드래퓌스 사건을 빗대 연설하지만 역시 허구다. 정지영 감독이 의도적으로 만든 장면이다.

정지영 감독은 '부러진 화살'을 통해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사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정지영 감독은 "내 친척도 법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다"며 "지금도 법원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지 않나"고 했다.

정지영 감독은 김 교수를 선으로 그리지 않았으며, 다만 법원의 절차 문제점을 지적하며 법원의 오만함을 경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해자를 절대악으로 그린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은 다르다.

실제 김 교수는 재판에 불만이 있다고 판사를 찾아가 위협했다. 판사의 집을 수차례 찾아가 동선을 파악했으며, 회칼을 준비했고, 석궁을 장전했었다. 영화에도 나왔듯이 재판 과정에 딴지를 걸고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고 했다. 그 탓에 감치를 당하기도 했다.

'부러진 화살'을 보고 관객이 사법부에 분노를 느꼈다면 정지영 감독의 의도가 통했단 뜻이다. '나꼼수' 팬들이 성토하든, 영화는 영화일 뿐 이라고 일축하든 그것 역시 관객의 몫이다.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니깐.

문제는 영화가 전부라고 보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틀과 잣대를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영국의 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세상의 문제는 바보들과 광신도들은 자기 확신이 지나친데 비해 현명한 사람들은 의심이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했다.

길은정 사건은 의문이 많았다. 편승엽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인이 길은정과 함께 기자회견에도 참석했지만 어느 순간 사라졌다.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했고, 판단은 재판부의 몫이었다.

재판부는 "K여인(성폭행 주장)과 호스트바 문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된다"고 적시했다. 또 "편승엽이 순애보의 주인공처럼 결혼을 했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나 그렇지 못한 데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받을 여지는 있지만 파렴치범으로 몰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부러진 화살'에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는 것은 사법부가 그 만큼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단 뜻이다. 법원은 '부러진 화살'에 대한 논박보단 사람들의 분노를 받는 이유를 먼저 자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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